
권병안 의병장 생가터
순천 독립운동가를 찾아가는 날은 여름에서 가을로 넘어가는 계절이라 날은 적당히 더웠고 하늘은 아름다웠다. 한국을 대표하는 절인 선암사가 있는 승주읍에 의병장 권병안(權柄顔) 선생님 생가가 있다고 해서 찾아보기로 했다. 다행히 표지판이 잘 되어 있어서 금방 찾을 수 있다.
집 앞에는 비석이 세워져 있어서 예사롭지 않았다. 게다가 순천시에서 광복 76주년을 맞아 설치한 표지판이 집 앞에 있어 쉽게 찾을 수 있었다. 그러나 집 문이 잠겨 있어 들어갈 수는 없었다.
포기하려던 찰라 이곳을 관리하는 분을 만나 생가 내부를 구경할 수 있었다. 관리하는 분은 권병안 의병장의 직계 후손은 아니고 먼 친척쯤 되는 일가이신 것 같았다. 후손이 떠나고 빈집을 마을 분이 대신 관리하고 있었다. 연세가 좀 있으셔서 관리가 힘들어 잠가 놓는다고 하셨다.
연세가 있으시고 몸이 불편하신 분이 본인의 의지로 독립운동가 생가를 돌본다니 감사했다. 돌보지 않은 많은 독립운동가 생가가 풀이 웃자라고 건물이 훼손되어 옛모습을 찾기 힘든 경우가 많았다. 그래도 여기는 집이 온전하게 있어서 다행이었다.
집은 권병안 선생님이 살던 시절 그대로 보존된 것은 아니다. 후손이 살면서 조금 편하게 고친 흔적이 여기저기 있다. 그러나 집 안에는 권병안 선생님의 행적을 알 수 있는 자료가 전시되어 있다.
권병안 선생님 집 넓은 뜰은 생전에 부유함을 아직 간직하고 있었다. 오래된 나무는 세월을 말하고 있었다. 관리자분 말에 의하면 상당한 부자였다고 한다. 예전에는 소유한 땅에서 나오는 쌀로 부자를 판별하기도 했다. 그래서 천석 부자니 만석 부자니하는 말이 있었다.
천석 부자는 아니지만, 오백석 정도 쌀을 수확하는 부자로 당시 일대에서 가장 잘 살았다고 한다. 의병장 관련 장소를 찾다 보면 원래 부자였던 분이 많다. 그러나 그 부를 개인을 위해 쓰기 보다 나라에 바친 분들이다.
의병 전쟁은 말 그대로 의로운 뜻을 가진 사람이 군사를 모아서 전쟁을 수행하는 것이다. 임진왜란 때도 을사늑약 이후에도 많은 의로운 사람이 자기 재산을 털어 항일 운동을 하였다.
전쟁사에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는 사람은 알겠지만, 전쟁에 수행되는 비용은 상당하다. 마키아벨리가 자신의 책에서 말하듯이 왕이나 군주가 전쟁을 수행할 때 빚내서 전쟁하지 않으면 다행이라 할 정도로 큰 비용이 든다. 그래서 현명한 지도자는 전쟁을 피하려고 노력한다.
군주가 빚내서 전쟁하면 결국 백성의 세금으로 그 돈을 갚을 수밖에 없다. 승전국이면 다행이지만, 패전국이면 승전국에 보상해야 해서 그 비용이 갑절로 늘어날 수밖에 없다.
아주 기본적으로 병사들을 먹어야 하고 무기를 제공해야 한다. 독립운동사에서 군자금을 얻거나 무기를 획득하기 위해 노력한 피눈물나는 이야기가 다양하게 나온다. 독립운동에 재산을 바치고 가진 게 없어 먹을 것을 구하지 못해 죽은 독립운동가도 여럿 있다. 대표적으로 전 재산을 독립운동에 바친 이회영 일가 중 둘째 이석영 선생님과 넷째 이호영 선생님이 그러하다.
권병안 선생님에 대해 관리자는 좋은 기억을 가지고 있는 듯하다. 가진 재산을 이웃에게 베풀며 살았고, 어려운 이들을 많이 도왔던 것 같다. 그래서 권병안 선생님이 의병을 일으켰을 때 많은 이들이 함께 했을 것이라 생각한다.
권병안 선생님은 권대화(權大化)라는 이명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보훈부 공훈 자료에서는 권대화라는 이름으로 기록되어 있다. 을사늑약 이후 권병안 의병장은 무력투쟁을 통해 국권을 회복하고자 전남 순천 일대에서 의병으로 활동하였다. 의병 활동 중 1909년 6월 20일 일병에게 피체된 후 탈출을 시도하였으나 총상을 입고 순국하였다고 한다.

권병안 선생 동상
생가에서 멀지 않은 도로변에 권병안 의병장 동상이 있다. 길가라 찾기가 쉬웠다. 지금이라도 당장 ‘전진 앞으로’ 할 것 같은 모습으로 서 있다. 감사의 인사를 드리고, 다음 독립운동가를 찾아 길을 나섰다.
호남의병운동


